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슈미트 (문단 편집) === 군복무 ===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슈미트는 21세였기 때문에 징집되었다. 초기에는 [[브레멘]] 지역에서 대공 근무를 맡다가 [[독소전쟁]]이 발발하자 [[레닌그라드 포위전]]을 비롯한 동부전선 초창기의 몇몇 전투에 참가한다.[* 훗날 총리시절 [[브레즈네프]]와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이게 소련측의 공격거리가 되자, 슈미트는 '낮에는 우리가 적으로 싸웠지만, 밤이면 나치의 멸망을 소망했다는 점에서 우린 동지였다.'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.] 이후 독일로 귀환한 슈미트는 재정부 및 법무부[*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 이후 벌어진 군 인사들의 재판에 참관인으로 참가했는데, 나중에 회고록에서 슈미트는 이 재판을 주관한 [[롤란트 프라이슬러]]에 대해 받은 인상을 [[단테]]의 [[신곡]]에 나오는 지옥의 수문장으로 비유하기도 했다.]에서 근무하다 1944년 12월 독일 공군 소속으로 [[벌지 전투]]의 서막을 장식한 독일군의 아르덴 공습에도 참가한다. 이 때의 공로로 [[철십자 훈장]]을 받기도 했다. 그렇지만 이미 심하게 기울어진 전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없었고 1945년 4월, 그는 [[뤼네부르크]]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같은 해 8월 석방된다. 최종계급은 [[중위]].[* 참고로 그와 동년배인 1918년생 독일 남자 중 2/3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하면, 슈미트는 천운을 타고난 셈.] 1958년, [[독일 연방군]] 예비역 대위로 진급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